TECH 으로 돌아가기
TECH HACKER NEWS 어제 7분 읽기 83 READS

카뮈의 '부조리'와 역사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카뮈의 '부조리'와 역사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SOURCE IMAGE · HACKER NEWS

1944년 8월, 레지스탕스가 파리 해방을 위해 싸우던 위태로운 시기에 알베르 카뮈는 코메디 프랑세즈로 장폴 사르트르를 찾아갔다. 사르트르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이 극장을 파괴 공작으로부터 지키라는 임무를 받고 파견돼 있었지만,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동에 지친 나머지 객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카뮈는 그를 깨우며 '자네는 자리를 역사의 방향으로 돌려놓았군'이라고 농을 던졌다.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이 장면에는 두 사람이 곧 격렬한 논적으로 갈라서게 될 근본적 차이, 즉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이미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1943년 6월 사르트르의 희곡 '파리떼' 초연에서 처음 만나 곧 가까워졌다. 출신은 대조적이었다. 사르트르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라 엘리트 교육기관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를 나온 반면, 카뮈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가난 속에서 태어나 거의 문맹이던 미망인 어머니와 폭군 같은 할머니 손에 자랐고 언론과 연극을 거쳐 전쟁 직전 파리로 왔다. 그럼에도 둘은 상호 존중과 철학적 공감으로 묶였다. 카뮈는 레지스탕스 신문 '콩바'의 편집장이 되자 사르트르를 통신원으로 영입했고,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 '출구 없음'의 주연을 카뮈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부조리를 부정하지 않기

둘의 대립은 카뮈의 '부조리' 개념에서 비롯됐다. 부조리란 이성과 명료함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삶의 비합리성·무의미함에 대한 자각 사이의 근본적 모순을 가리킨다. 이 자각은 어느 길모퉁이에서든 불시에 얼굴을 후려칠 수 있으며, 한번 보고 나면 익숙한 습관과 신념이 무의미해지고 자기 삶 속의 이방인이 된 듯한 소외감을 남긴다. 카뮈는 이에 대한 흔한 반응들, 즉 쾌락주의·신앙·절망·자살이 모두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부조리를 부정함으로써 무의미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우리가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므로,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인간다움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이 된다.

더 만족스러운 답은 부조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1939년 '알제 레퓌블리캥'에 쓴 대로 부조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했다. '시시포스 신화'(1942)에서 그는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죽음은 불가피하고 사랑은 변덕스러우며 명성은 덧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에 아무런 이치가 없다면 모든 행위는 도덕적으로 등가이며, 남은 과제는 그 승산 없는 싸움을 온전히 사는 것, '행복한 시시포스'가 되는 것이다. 소설 '이방인'(1942)의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고 연인에게 무심하며 살인에 후회를 표하지 않아 사회로부터 단죄되지만, 처형을 앞두고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항과 혁명의 갈림길

이 사유는 정치로 이어졌다. '반항하는 인간'(1951)에서 카뮈는 인간에게는 부당함에 맞서 반항하려는 본능이 있다고 보았다. 사르트르 역시 반항을 세계의 비합리성에 대한 이성적 반응으로 인정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역사적 과정의 일부로 이해했다. 그는 마르크스와 달리 역사에 예정된 경로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결과를 안다는 듯 행동한다면 공산주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카뮈도 한때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제명되고 노동극장을 운영하며 역사의 방향성을 말한 적이 있었지만, 2차 대전과 나치즘의 경험이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카뮈에게 핵심은 반항과 혁명을 구별하는 데 있었다. 혁명은 완전한 사회 질서를 세워 부당함을 끝내려 하지만, 그 이상적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지키려던 자유와 인간성을 짓밟는다. 그가 보기에 이 점에서 소련은 나치 독일과 구별되지 않았다. 반면 반항은 공유된 인간성과 생명의 가치를 붙들며 타인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희생자도 가해자도 아닌'(1946)에서 그는 반항이 역사를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싸우되, 역사의 소관이 아닌 인간의 부분을 역사로부터 지켜내려는' 것이어야 한다고 썼다. 소설 '페스트'(1947)의 기자 랑베르가 도시를 탈출하려다 결국 남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이 연대의 구체적 형상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격분했다. 그의 비서 프랑시스 장송이 '반항하는 인간'에 대한 반박을 썼고, 역사의 본질을 둘러싼 격렬한 지상 논쟁이 이어졌다. 장송은 카뮈가 역사의 역할을 사실상 부정했다고 몰아붙였고, 카뮈는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소련 강제노동수용소를 규탄하지 않는 사르트르처럼 '역사에 눈멀어 현재의 고통을 못 보는' 이들을 겨냥했을 뿐이라고 응수했다. 1957년 카뮈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3년째 이어지던 알제리 전쟁에 대해 독립도 프랑스 정부도 온전히 지지하지 않고 평화 공존과 모호한 휴전을 호소한 태도로 프랑스 내에서 적잖은 비판을 받았다.

논쟁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채, 카뮈는 더 정교한 반론을 준비하던 1960년 1월 4일 친구이자 출판인 미셸 갈리마르와 함께 프랑스 북부 상스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얼마 전 한 친구에게 자신의 진짜 작업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의 관점에서 이 논쟁은 하나의 교훈으로 읽힌다. 완결된 이상을 향해 현재를 도구화하는 사고와, 불완전함을 인정한 채 눈앞의 사람과 연대하는 사고의 대비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어떤 거대한 목표를 명분 삼는 모든 기획에 적용된다. 확실한 결말을 미리 안다고 전제하고 현재의 비용을 정당화하는 순간, 지키려던 가치 자체가 훼손될 수 있다는 카뮈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SOURCE · HACKER NEWS
원문 전체 보기 → https://www.historytoday.com/archive/portrait-author-histori...
SHARE
처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