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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가 세상을 지배한 뒤 벌어진 일: '지식인'의 실종

너드가 세상을 지배한 뒤 벌어진 일: '지식인'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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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만 해도 판타지 소설은 표지에 '걸어다니는 나무'가 그려진, 남학생들끼리 은밀히 돌려보던 부끄러운 물건이었다. 원문 저자는 자신의 사춘기를 회고하며, 당시 『왕좌의 게임』을 읽은 또래 여학생을 한 명도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마블 영화 덕분에 중년의 어머니들조차 '타노스'가 누구인지 알고,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는 온 국민이 '화이트 워커'와 '발리리아 강철'을 입에 올렸다. 저자는 이 흐름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2001년 개봉한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를 꼽는다. 이른바 '너드(nerd) 문화'가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문화적 대관식과도 같은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왜 너드가 문화를 삼켰나

이 현상을 두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너드가 문화 상품에 기꺼이 돈을 쓰기 때문'이라는 소비력 중심의 설명을 제시했다. 마법의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을 만든 위저즈 오브 더 코스트나 수집품 시장의 규모를 보면 분명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자의 진단은 인과의 방향을 뒤집는다. 너드가 돈을 써서 문화가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너드 자신이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문화가 그들에게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1985년에 D&D를 하던 아이들이 1995년에 닷컴 창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개인용 컴퓨터 혁명, 인터넷, 암호화폐 열풍, 그리고 오늘의 AI 붐으로 이어지는 30여 년간 기술 기업들은 S&P 500을 능가하는 성과를 냈다. 빌 게이츠에서 제프 베이조스, 그리고 빌 게이츠보다 더한 너드라고 저자가 표현한 샘 올트먼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정점에 선 이들이 곧 너드였다.

미메시스, 그리고 톨킨이라는 암호

저자는 여기에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mimetic desire)' 이론을 겹쳐 읽는다.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존재여서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월가 금융맨이나 1950년대 중산층 회사원이 아니라 『실마릴리온』을 읽으며 오후를 보내던 사람들이 위계의 꼭대기에 오르자, 그들의 취향이 아래로 흘러내려 사회 전체의 욕망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근거는 실리콘밸리 곳곳에 남아 있다. 세계 최고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Y컴비네이터의 폴 그레이엄은 자신들을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비유하며 '장르 자체를 발명했다'고 말했고, 팔란티어·앤듀릴·발라·바르다처럼 톨킨 신화에서 이름을 딴 회사들이 실제로 그의 투자를 받았다. 피터 틸의 취향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관찰이다.

승리가 부른 역설

정작 저자의 핵심 우려는 다른 곳에 있다. 너드 문화의 완승이 뜻하지 않게 '고급 문화'의 숨통을 조르고 있다는 것이다. 논리는 이렇다. 대부분의 지식인은 너드이지만, 모든 너드가 지식인은 아니며 오히려 다수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 다수의 취향이 소수를 압도하면서, 문화는 『기묘한 이야기』식 향수 소비, 마블의 정체불명 CGI 범벅, 팰퍼틴이 몇 번이고 부활하는 스타워즈 재탕으로 채워진다. 원래대로라면 일부 너드는 문학을 읽고 예술영화를 만들고 시를 쓰는 '지식인'이라는 더 섬세한 존재로 탈바꿈해야 하는데, 중간 지대의 대중문화가 너무나 매력적이고 편재해 있어 그 탈피의 생애주기 자체가 멈춰버렸다는 진단이다.

한국 IT 실무자에게 이 글은 단순한 팝컬처 잡담을 넘어선 지점을 건드린다. 우리 업계 역시 SF적 상상력과 서브컬처 레퍼런스를 공유 언어로 삼아 왔고, 제품명과 조직 문화, 심지어 투자 유치 화법에까지 그 코드가 스며 있다. 저자의 관찰이 옳다면, 특정 취향이 곧 '엘리트의 언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창의성의 원천이자 동시에 사고의 획일화 장치가 될 수 있다. 기술이 성장의 엔진인 한 너드가 계속 부자가 되고, 부자가 위계의 꼭대기에 서며, 문화가 그들의 취향에 머문다는 저자의 순환 논리는 우리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이 글은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명백히 한 편의 논평이라는 점을 감안해 읽어야 한다. 논거의 상당 부분이 저자 개인의 기억과 미국 대중문화 사례에 기대고 있고, '너드'와 '지식인'을 가르는 기준도 엄밀하다기보다 인상 비평에 가깝다. 취향의 대중화가 정말로 고급 문화를 죽이는지, 아니면 그저 다른 형태로 재편하는지에 대한 실증적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헤엄치는 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저자의 경구는 곱씹을 만하다. 기술 엘리트의 취향이 어느새 사회 전체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시대에, 그 취향의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점점 더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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